김춘수의 <꽃>은 서로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의미있는 존재가 된다는 발상으로부터 창작된 작품입니다. 그때의 '이름'이란, 진짜 '나'에 걸맞는 이름, 관계 등이지요.
이를 바탕으로, 이 작품을 패러디한 다른 두 작품의 주제를 파악해보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1차시
김춘수의 <꽃>
(해설)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상대방을 꽃으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이게 가능하려면, '이름'은 상대방을 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를 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상대방을 꽃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그 실마리가 3연에 나옵니다. '내'가 불리고 싶어하는 이름의 성격이지요. 바로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 상대방이 원하는, 상대방이 스스로 자신의 빛깔과 향기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그런 이름입니다.
그럼, 다시 궁금해집니다.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이름을 어떻게 부르지?" 그게 쉬운 것이라면 누군가가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지도 않겠죠.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가만히 멈춰서서 한참을 바라보고 코를 가까이 가져가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을 그렇게 은은하게 따뜻한 시선으로 잘 대해주고 있나요? 우리는 어쩌면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대방의 빛깔과 향기로부터 더 멀어진 이름으로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간단하게나마 학생들이 학급 친구들의 빛깔과 향기를 느껴보고 그에 맞는 이름을 지어주는 활동을 기획하여 진행하려고 해요.
(수업활동)
(1) 모둠원 A,B,C,D가 있다면 A의 이름을 B,C,D가 하나씩 지어주거나 협의해서 제안합니다. 이 이름을 짓기 위해 이름을 짓는 모둠원들은 반드시 A의 내면을 수긍하고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에이, 그거 아닌데~"와 같은 반응은 안 됩니다. 같은 방식으로 B,C,D의 이름도 짓습니다. (이름 예시: 차가운 형산강, 만능맨, 알고보면 진지한 소년 등 아무거나 상관없음.)
(2) 이름을 다 지으면 칠판에 모둠별로 모두 씁니다.
(3) 한 모둠씩 나와서 칠판 앞에 서고 나머지 친구들이 협의하며 누구의 이름인지 맞힙니다.
(4) 결과를 공개하고 그 이름을 짓게 된 경위를 듣습니다. 이때에도 앉아있는 친구들의 공감이 필수입니다. 절대 야유나, 어리둥절한 표정은 안 됩니다.
물론, 이 활동만으로 인해 겉으로 보이는 모습뿐만이 아닌, 친구의 내면까지도 들여다보고자 하는, 인간관계의 놀라운 성장이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상대방이 원하는 모습을 알아보려 시도했다는 점과 시에서 언급한 중요한 시어와 설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 * *
2차시
오규원의 <'꽃'의 패러디>
(수업활동) 3연의 '풀, 꽃, 시멘트, 길, 담배꽁초, 아스피린, 아달린'과 '금잔화, 작약, 포인세티아, 개밥 풀, 인동, 황국'의 차이를 사전을 이용하여 찾기. (힌트. 금잔화, 작약, 포인세티아, 황국의 설명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단어가 있음.)
(해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상대방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거나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면, 그냥 내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보통 이렇게 사람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기준이 아닌, 나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규정짓습니다. A의 말을 통해 B를 판단합니다. 대상을 왜곡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 남들에 의해 불리는 이름을 배제하고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남들이 불러주는 이름들에 길들여졌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이해 없이 오히려 더 많은 이름으로 불리기 위해 허상을 좇고 있는 현대인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정일의 <라디오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수업활동) (1) '라디오 같은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요? (2) 사랑을 끄고 켠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라는 질문에 답 찾기.
(해설) 낭만적인 시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닙니다. 4연을 보면 압니다. '사랑'을 하고 싶다고 하는데 그것은 '라디오' 같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라디오'는 마음대로 끄고 켜는 것입니다. 즉, 화자는 마음대로 끄고 켤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싶어 합니다. 나쁜 놈이지요.
그런데, 화자는 왜 이런 사랑을 하고 싶어 할까요? 그것은 3연에 나옵니다. '굳어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속'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황폐화된 것이지요. 우리는 압니다. 이런 상태라면, 김춘수의 <꽃>처럼 빛깔과 향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야만 한다는 것을. 그러나 어려운 일이지요. 어쩌면 그 과정에서 화자는 상처를 많이 입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이 작품은, 황폐해진 가슴을 안고도 진정한 사랑을 찾기보다는 가벼운 만남을 선호하는, 그런 현대인의 모습을 표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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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에 진행했던 수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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