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지금부터 당신은 회사원입니다.
하루 일과를 상상해 봅시다. 당신은 오전 8시에 회사에 도착합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오늘 안에 처리할 업무 리스트를 나열하고 업무 A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3분 정도 지났을까, 파트장이 당신을 찾습니다. 당신은 하던 일을 멈추고 30분 동안 파트장에게서 업무 B에 대한 설명을 듣죠. 업무 B에 대한 작업은 당장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제 9시가 다 되어가는군요. 9시 부터는 업무 B를 중단하고 다른 사무실로 옮겨 전혀 다른 업무 C를 시작해야 합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처음 몇 분간 짧은 브리핑과 꽤 긴 강의를 듣고 난 후,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리포트를 작성하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군요. 하지만 또다시 다른 업무로 전환해야 하는 타이밍입니다. 당신은 다시 한번 사무실을 옮기고 이 모든 과정을 반복합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업무 D를 진행해야한 다는 점이죠. 그렇게 다시 한 시간이 흘러갑니다.
이 패턴은 하루가 끝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반복됩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요. 주말에는 주중에 끝내지 못한 일들을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게다가 각 분야를 담당하는 관리자들은 서로 전혀 소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각자 담당하는 분야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양 당신에게 각기 다른 업무를 끊임없이 부여합니다. 당신은 회계 처리뿐만 아니라 분석 리포트를 쓰고 마케팅과 영업을 담당하면서 그 외에도 스무 가지 다른 업무를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입장인데도 말이죠.
뭔가 익숙하게 느껴지시나요? 이미 눈치채셨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정은 바로 고등학교의 일상입니다. 실제 비즈니스의 환경에서 이런 상황에 직원을 몰아넣는 CEO는 절대 없을 겁니다. 하지만 12~18세의 청소년들은 매일같이 학교에서 겪고 있는 실제 상황이지요.
이러한 시스템은 완전히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과목에서 다른 과목으로 옮겨 다니는 단절된 구조 때문에 제대로 된 성과를 내기도 전에 다음 과제를 시작해야 하고, 생산성은 바닥을 치게 됩니다. 만약 교육의 목표가 최대한 많은 양의 콘텐츠를 전달하는 것이라면 아주 약간은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엄청난 양의 불필요한 정보가 학생들에게 퍼부어지고 있기는 하지만요.) 하지만 이마저도 잦은 주제 전환 때문에 겉핥기 이상의 깊이로 배우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렇게 시스템의 제약을 받는 것은 비단 학생들뿐만이 아닙니다. 교사 또한 시간마다 들이닥치는 서로 다른 20여명 이상의 학생을 상대해야 합니다. 매일 6번의 수업을 진행하고, 180명 정도의 학생들을 만나게 되죠. 매주 혹은 2주, 아니 3주마다 각별히 시간을 들여 살펴보고 피드백 해야 할 프로젝트도 그만큼이 될 겁니다. 게다가 수업은 반복적이고 지속적이면서도, 다양하고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모든 수업을 마치고 나면 다음 날 수업을 준비하는 데에는 한 시간 남짓을 할애할 수 있습니다. 남은 하루 동안에도 참석해야 하는 길고 긴 미팅이 줄을 서고, 미처 끝내지 못한 평가나 계획 등의 남은 업무와 함께 퇴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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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교사와 학생이 마주하는 가장 큰 문제는 ‘시간’입니다. 백명이 넘는 학생을 한 명의 교사가 일일이 모니터링하고, 평가하고, 피드백하고, 깊이 있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학생은 끝도 없는 과제에 쌓여 무언가를 제대로 학습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고요. 모두가 하나같이 시간에 쫓기는 입장입니다.
지금의 교육은 21세기 역량에 맞지 않는 낡고 오래된 시스템에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고등학교 커리큘럼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미 1차 분류된 지식을 전문성이라는 기준에 따라 더욱더 세분화 시키는 대학교의 구조입니다. 대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본인이 선택한 분야를 공부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때 주요 목표는 집중과 선택에 따른 전문화입니다. 대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는 대부분 전공 수업만을 들으면서 실무와 응용 위주의 내용 또한 개개인의 세분된 관심사와 예상하는 진로와 관련지어 진행하게 됩니다. (물론 이상적인 경우라면 실제 현장과 깊은 관련이 있겠죠.)
하지만 이러한 대학 교육의 원칙과 구조는 고등학교에 흘러들면서 전문화와 실제 현장과의 연계라는 핵심 요소를 잃어버린 채 국어, 수학, 영어, 과학, 미술과 같이 분절된 교과로 남게 되었고, 그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처참합니다. 수많은 전공과목에 대한 넓고 얕은 지식과 전공 분야에 대한 지엽적인 학업적 토대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이것저것에 대해, 아주 조금씩. 자그마치 4년 동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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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장 해결방안이 뭐냐고요? 너무나도 간단한 해결방안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하루에 긴 수업을 두 개씩 듣도록 하면 됩니다. 6주에서 8주 정도의 기간 동안요. 아침에 등교해서 오전 시간 동안 한 과목을 집중해서 공부하는 거죠. 고대사, 셰익스피어 극 한두 개, 세포 생물학, 몇 가지의 특정 수학 개념 등.. 마찬가지로 오후에는 다른 과목에 집중하고요. 이렇게 하나의 사이클을 끝내고 나면 그다음 분기에는 또 다른 두 과목을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학습합니다.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배움의 깊이를 효과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입니다. 물론 이 방법으로 다양한 선택지를 충분히 서포트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교사는 각각의 학생들과 조금 더 자주, 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지요.
이와 같은 시스템이라면 제가 가르치는 영어 수업의 경우, ‘문학’을 ‘문학’으로서 접할 수 있는 시간이 됩니다. 몇 달 동안 수차례에 걸쳐 잘게 쪼개어진 부분을 서둘러 이해하는 대신, 충분한 시간과 주의를 갖고 글을 글답게 소화할 수 있습니다. 영문학을 배우는 기간에는 이전에 동시다발적으로 신경 써야 했던 수많은 다른 과목들의 압박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은 수업 중에 2시간은 글을 쓰고, 서로 쓴 글을 공유하면서 수정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습니다. 하루 이틀이면 읽기-쓰기-말하기-다시 쓰기의 사이클이 가능하죠. 더불어 학생들에게 세 시간 정도 ‘읽기’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교사인 저는 각각의 학생과 1:1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교사로서 교실 안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각각의 학생이 학습 수준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누가 무엇 때문에 어떻게 힘들어하는지 혹은 어디서 성과를 내고 있는지를 살피면서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50분 짜리 수업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요.
작은 그룹의 학생들과 하루에 4~5시간씩 6주 동안 함께하는 교사에게는 학생들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집니다. 학생들 또한 다른 수업이나 다른 선생님, 다른 교과에 대한 압박 없이 그 시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습니다.
학교라는 시스템은 효율성을 기반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6주짜리 모듈을 선택한다고 해서 최대한의 학생 수를 최소한의 교사에게 배치하는 효율 중심의 구조는 획기적으로 바뀌기 어렵죠. 한 명의 교사가 1년 동안 상대해야 하는 학생의 수는 결국 같을 테니까요. 학생 모두를 1년 내내 조금씩 짧은 시간 동안 만나는 것 대신 한 번에 비교적 작은 그룹의 학생들을 집중적으로 보는 방식으로 바뀔 뿐입니다.
하지만 일정 기간 동안 하루에 1~2개의 주제를 학습하는 학생은 해당 분야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학습의 효과를 높이는 것이 수월해지고, 막대한 양의 과제에 대한 부담도 줄어들 뿐 아니라 집중도도 높아지겠죠. 교육이 실제로 효율적이기를, 효과적이기를 기대한다면 실제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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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김소은
편집. 한성은, C Program 러닝펀드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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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배움을 찾고 있는 교육자들을 위한 공간 ― 온더레코드'의 뉴스레터(weekly #52)에 실렸던 글입니다. “또 한 명의 좌절 속 교사(just another frustrated teacher)”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미국 고등학교 교사의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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